““목사님 많이 아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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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294회 작성일 16-07-27 10:43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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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떠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이귀선 권사님이 시온성교회를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지난 7월 17일 주일이 우리가 만나는 마지막 주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연세가 많으시니 언제라도 변고가 일어날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떠나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주일아침마다 “How are you?\"”Shalom!\"으로 인사하시던 멋쟁이 권사님이 지난 주일에는 ‘목사님 내 많이 아파요!’ 하셨습니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이신애 사모님도 그렇게 쉽게 가시더니 이 권사님도 그렇게 훌쩍 떠나셨습니다. 언젠가는 마지막으로 길게 한 번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든다는 게 차일피일하다 끝내 시간을 놓치고 말아 아쉬움이 큽니다.
1926년 3월 29일 칠보산이 있는 경북 영덕군 변곡면 원황리에서 태어나셔서 올 해로 만 90세가 되신 권사님. 일제 강점기부터 예수님을 알고 믿음을 갖게 되셨습니다. 22살이 되던 47년에 첫 딸을 얻은 이후 2남 4녀의 자녀를 낳았습니다만 1964년 39세 때에 남편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막내딸이 겨우 세 살 되던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이권사님은 동향의 친구이자 고신총회의 총회장을 지내신 고 신명구목사님으로부터 부산으로 나오라는 권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기가 쉽지 않은 터라 권사님은 동향 친구 목사님의 말을 따라 대식구를 데리고 무조건 부산으로 나오셨습니다.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제2영도교회, 부산남교회 등 신목사님이 사역하시는 곳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82년도에 구포로 이사오셔서도 여전히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구포제일교회 이삼렬 목사님을 만나 권고를 받게 되어 우리교회에 등록하셨습니다. 그 때가 60세이시던 1985.12.8일입니다. 그 후 만 30년을 권사님은 우리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권사님은 지난해 3월 말, 우리 나이로 90세 생일을 맞을 즈음부터 교역자팀에 심방을 요청해 오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4월 7일에 방문하였습니다. 권사님은 제게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2백만원이 든 헌금봉투였습니다. 우리 홈페이지에 싣기도 했습니다만 사연은 이렇습니다. 권사님은 몸이 연약하여 절대로 80세를 넘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생기는 용돈을 아껴 모으셨습니다. 택시비를 주면 가다가 내려 버스를 타면서 한푼 두푼 저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80세가 되어도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그때까지 모은 3백만원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언제갈 지 모르는 마지막 길을 준비했습니다. 90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권사님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십년간 모은 2백만원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너무나 어렵게 힘들게 살아오신 삶인데, 전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으시는 금 같은 믿음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권사님은 수년전부터 건강이 나빠져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게 되자 혼자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 다니엘처럼 예배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습니다. 혼자서 충만한 삶을 누렸습니다. 큰 아들을 비롯한 자녀들의 신앙을 위한 기도가 늘 1순위였습니다. 지난 주간 오셔서 감사예물로 드렸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직접 감사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녀들 믿음 주옵소서.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끝내 믿음의 자녀요, 범사 감사였습니다! 지난 해 9월 우리는 마침내 우리교회 최초의 명예 권사로 추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권사님은 주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순식간에 떠나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이귀선 권사님이 시온성교회를 떠나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지난 7월 17일 주일이 우리가 만나는 마지막 주일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연세가 많으시니 언제라도 변고가 일어날 수 있지만 그렇게 쉽게 떠나가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주일아침마다 “How are you?\"”Shalom!\"으로 인사하시던 멋쟁이 권사님이 지난 주일에는 ‘목사님 내 많이 아파요!’ 하셨습니다. 그게 끝이었습니다. 이신애 사모님도 그렇게 쉽게 가시더니 이 권사님도 그렇게 훌쩍 떠나셨습니다. 언젠가는 마지막으로 길게 한 번 이야기하는 시간을 만든다는 게 차일피일하다 끝내 시간을 놓치고 말아 아쉬움이 큽니다.
1926년 3월 29일 칠보산이 있는 경북 영덕군 변곡면 원황리에서 태어나셔서 올 해로 만 90세가 되신 권사님. 일제 강점기부터 예수님을 알고 믿음을 갖게 되셨습니다. 22살이 되던 47년에 첫 딸을 얻은 이후 2남 4녀의 자녀를 낳았습니다만 1964년 39세 때에 남편이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막내딸이 겨우 세 살 되던 때였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서 이권사님은 동향의 친구이자 고신총회의 총회장을 지내신 고 신명구목사님으로부터 부산으로 나오라는 권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살기가 쉽지 않은 터라 권사님은 동향 친구 목사님의 말을 따라 대식구를 데리고 무조건 부산으로 나오셨습니다. 큰 결심을 한 것입니다. 제2영도교회, 부산남교회 등 신목사님이 사역하시는 곳에서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 82년도에 구포로 이사오셔서도 여전히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구포제일교회 이삼렬 목사님을 만나 권고를 받게 되어 우리교회에 등록하셨습니다. 그 때가 60세이시던 1985.12.8일입니다. 그 후 만 30년을 권사님은 우리교회와 함께 하셨습니다.
할 일을 다 하셨습니다.
권사님은 지난해 3월 말, 우리 나이로 90세 생일을 맞을 즈음부터 교역자팀에 심방을 요청해 오셨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여 4월 7일에 방문하였습니다. 권사님은 제게 봉투를 내미셨습니다. 2백만원이 든 헌금봉투였습니다. 우리 홈페이지에 싣기도 했습니다만 사연은 이렇습니다. 권사님은 몸이 연약하여 절대로 80세를 넘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장례를 위하여 생기는 용돈을 아껴 모으셨습니다. 택시비를 주면 가다가 내려 버스를 타면서 한푼 두푼 저금을 했습니다. 그런데 80세가 되어도 하나님이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그때까지 모은 3백만원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언제갈 지 모르는 마지막 길을 준비했습니다. 90세가 되었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권사님을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지난 십년간 모은 2백만원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처음 그 말을 듣고 나는 속으로 울었습니다. 너무나 어렵게 힘들게 살아오신 삶인데, 전혀 자기를 위하여 살지 않으시는 금 같은 믿음이 너무 감사했습니다.
권사님은 수년전부터 건강이 나빠져 새벽기도회에 나올 수 없게 되자 혼자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하루에 세 번 다니엘처럼 예배합니다.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 읽습니다. 혼자서 충만한 삶을 누렸습니다. 큰 아들을 비롯한 자녀들의 신앙을 위한 기도가 늘 1순위였습니다. 지난 주간 오셔서 감사예물로 드렸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직접 감사의 내용을 담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자녀들 믿음 주옵소서. 범사에 감사하게 하옵소서.\" 끝내 믿음의 자녀요, 범사 감사였습니다! 지난 해 9월 우리는 마침내 우리교회 최초의 명예 권사로 추대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권사님은 주님과 함께 평안을 누리시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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