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떠난 자리에 교회만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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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14회 작성일 14-12-09 10:10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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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떠난 자리에 교회만 남았습니다!”
팽목항에 목사 잠수사가 있었습니다.
군산 양무리 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하는 정경완 목사. 어제 토요일 아침 그가 불쑥 역사 앞에 고개를 내 밀었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그를 만납니다. 그의 나이 40세. 그 젊은 현직 목사가 하필 잠수부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의외였습니다. 지난 2010년 ‘잠수기능사’ 자격증을 딴 그는 세월호 실종자의 수색작업이 시작되자 군산에서 내려와 팽목항에서 잠수사로 6개월간이나 일을 한 것입니다. 목사 잠수사. 그런 특이한 삶을 살아가는 지난 6개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얼굴을 내민 데는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할 말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는 선교사를 꿈꾸는 청년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등록금, 동생들 학비를 벌기 위해 그가 택한 일이 잠수부. 군산 서쪽 먼 바다 어청도 출신인 그에게 그 일은 그리 낯설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바이트로 잠수부 일을 하던 그는 2010년 선교사로서 사역하는 데는 자격 있는 잠수부가 되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에 잠수 기능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쩌다가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가담하게 되면서 아픈 가슴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9명의 실종자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수색을 중단하게 되어 늘 빚을 지고 있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펄에 박힌 배의 부분을 수색하면 실종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색책임을 진 해경이나 해양수산부가 내켜 하지 않아 수색해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합니다. 수색을 마치고 짬짬히 성경을 읽고 있으면 동료 잠수사들이 “당신 집사요? 장로요? 애들 빨리 찾게 기도 쎄게 하시오.” 라고 부탁하더라고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한계상황 앞에서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죽은 게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가 들려주는 구조된 실종자들의 모습에 대한 얘기는 우리를 너무 안타깝게 합니다.
“시신을 수습하다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었다는 것,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것. 손에 상처가 없어요. 움직이지 말라는 선내 방송을 믿고 대기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거죠. 질식 순간에 참으려고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싶어요.....잠수사 끼리 모이면 욕을 했어요. 선장 죽일 놈이라고요. 하선(下船) 명령만 내렸어도 구명복 입고 있던 승객이 모두 살 수 있었는데...”
목사 잠수사의 입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증언은 잊었던 분노를 다시 솟구쳐 오르게 합니다. 그가 들려주는 어느 아이의 마지막 모습은 할 말조차 잃게 합니다. 여객선의 동그란 창문, 무척 두터운 유리로 되어있는데, 한 여학생이 그 창문을 깨고 탈출하려다가 결국 실패하여 머리만 창문에 낀 채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참혹한 광경에 울었고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는 그 목사님이 안타까워집니다.
교회는 끝까지 남았습니다.
그런 목사 잠수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그 재난의 현장에서 열심히 섬기며 봉사했는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었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잠수사와 팽목항의 유가족, 봉사자들을 위해 끝까지 남아 도운 것은 진도기독교연합회와 한국기독교 연합봉사단이었다는 것. 열량 소모가 높은 잠수사들에게 교회가 바다 한복판 바지선까지 와서 부족한 에너지를 늘 제공한 사실, 모두가 떠난 곳에 연합회와 봉사단은 끝까지 남았다는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벤트성 행사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도 거기에 끝까지 있어야 합니다. 이 성탄절기에 우리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그곳에서, 이처럼 가슴시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교회만 남았습니다!”
팽목항에 목사 잠수사가 있었습니다.
군산 양무리 교회에서 청년부를 담당하는 정경완 목사. 어제 토요일 아침 그가 불쑥 역사 앞에 고개를 내 밀었습니다. 신문을 통해서 그를 만납니다. 그의 나이 40세. 그 젊은 현직 목사가 하필 잠수부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은 의외였습니다. 지난 2010년 ‘잠수기능사’ 자격증을 딴 그는 세월호 실종자의 수색작업이 시작되자 군산에서 내려와 팽목항에서 잠수사로 6개월간이나 일을 한 것입니다. 목사 잠수사. 그런 특이한 삶을 살아가는 지난 6개월 동안 그 어느 누구도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얼굴을 내민 데는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할 말이 있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는 선교사를 꿈꾸는 청년으로 신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등록금, 동생들 학비를 벌기 위해 그가 택한 일이 잠수부. 군산 서쪽 먼 바다 어청도 출신인 그에게 그 일은 그리 낯설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르바이트로 잠수부 일을 하던 그는 2010년 선교사로서 사역하는 데는 자격 있는 잠수부가 되는 것도 유익할 것이라는 생각에 잠수 기능사가 되었습니다.
그가 어쩌다가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가담하게 되면서 아픈 가슴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9명의 실종자 시신을 찾지 못한 채 수색을 중단하게 되어 늘 빚을 지고 있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펄에 박힌 배의 부분을 수색하면 실종자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수색책임을 진 해경이나 해양수산부가 내켜 하지 않아 수색해 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워 합니다. 수색을 마치고 짬짬히 성경을 읽고 있으면 동료 잠수사들이 “당신 집사요? 장로요? 애들 빨리 찾게 기도 쎄게 하시오.” 라고 부탁하더라고 합니다.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는 한계상황 앞에서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설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죽은 게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가 들려주는 구조된 실종자들의 모습에 대한 얘기는 우리를 너무 안타깝게 합니다.
“시신을 수습하다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구명조끼를 입었다는 것,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것. 손에 상처가 없어요. 움직이지 말라는 선내 방송을 믿고 대기하고 있다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한 거죠. 질식 순간에 참으려고 주먹을 쥐지 않았을까 싶어요.....잠수사 끼리 모이면 욕을 했어요. 선장 죽일 놈이라고요. 하선(下船) 명령만 내렸어도 구명복 입고 있던 승객이 모두 살 수 있었는데...”
목사 잠수사의 입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증언은 잊었던 분노를 다시 솟구쳐 오르게 합니다. 그가 들려주는 어느 아이의 마지막 모습은 할 말조차 잃게 합니다. 여객선의 동그란 창문, 무척 두터운 유리로 되어있는데, 한 여학생이 그 창문을 깨고 탈출하려다가 결국 실패하여 머리만 창문에 낀 채 죽어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참혹한 광경에 울었고 지금도 생각하면 몸서리가 친다는 그 목사님이 안타까워집니다.
교회는 끝까지 남았습니다.
그런 목사 잠수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따로 있었습니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열심히 그 재난의 현장에서 열심히 섬기며 봉사했는지, 어떻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었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잠수사와 팽목항의 유가족, 봉사자들을 위해 끝까지 남아 도운 것은 진도기독교연합회와 한국기독교 연합봉사단이었다는 것. 열량 소모가 높은 잠수사들에게 교회가 바다 한복판 바지선까지 와서 부족한 에너지를 늘 제공한 사실, 모두가 떠난 곳에 연합회와 봉사단은 끝까지 남았다는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벤트성 행사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도 거기에 끝까지 있어야 합니다. 이 성탄절기에 우리의 사랑과 도움이 필요한 그곳에서, 이처럼 가슴시린 이야기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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