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옥순 집사님, 그 미소가 벌써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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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176회 작성일 12-07-07 16:16본문
홍옥순 집사님, 그 미소가 벌써 그립습니다!
웃음을 읽지 않은 홍집사님
우리는 지난 주간 우리 곁에 있던 사랑스러운 집사님을 홀연히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집사님을 잘 아는 분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 구역식구로 지냈던 박금열집사님이 누구보다 슬퍼하셨습니다. 늘 함께 아파하며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라,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박집사님이 유난히 눈물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홍집사님은 키가 작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150센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목소리는 탁한 기가 섞였습니다. 그리고 늘 웃으셨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을 그의 표정에서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로 한 번 심방을 하여 대강의 형편은 보았지만 왠일인지 평소처럼 꼬치꼬치 물어보지도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에게는 장로 동생도 있고 독립기념관 역사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역사학자 동생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혼자 출석하고 있어 적적해 보였지만 1녀 4남 중에서 ‘제일 큰’ 누님이었습니다. 실제로 홍집사님은 남자 동생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위력(!)을 보여준 누님이었음을 동생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따사로운 형제간의 정리를 나누며 살아왔음이 분명했습니다.
뒤늦게 찾은 구원의 길
집사님은 오랫동안 신앙적으로 동생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명덕 희덕 두 아들이 어릴적부터 삼촌들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둘째 아들은 용인에 살면서 지구촌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요즘 수영로교회를 다닌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권유했을 것이 틀림없고 동생들도 기도하고 있었으니 집사님도 마침내 신앙생활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 때가 2,00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전 1998년, 영주동에서 살다 1992년 구포로 이사 온 후에 남편을 위암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사님은 남편을 보낸 후 슬픔 속에 마침내 신앙의 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2001년에 세례를 받았고, 2005년에 집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6년 3월 들어서서야 구역예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제게 이야기 하였더랬습니다. 구역모임에 참여한 일이 신앙역사에 큰 몫을 차지하였던 모양인지, 그 시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집사님은 모든 일에 충직하게 사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들에 늘 참석하였습니다. 눈이 아름다웠던 집사님의 눈가는 늘 웃음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은 인생 길
55세에 남편을 병으로 보내고 사는 삶이 쉬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혼자서 가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을 가진 후에 늘 웃음을 보였지만 속마음은 늘 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일곱 번 도전하여 대학에 들어간 큰 아들이 웬일인지 우울증세를 보이더니 알코홀에 빠져드는 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하여 아파하였음을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집사님이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아들에 대한 염려를 가장 많이 하였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쓰러지는 날도 며칠 전부터 가슴을 아파했고 동네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심병원으로 갔고 입원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약 먹고 해결할 것이라고 약방에 들렀다 쓰러졌다고 했습니다. 이미 심근이 경색되기 시작했었지만, 증세를 예사롭게 여긴 것입니다. 물론 그건 지금 나의 아쉬움입니다. 집사님은 그냥 자신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환한 웃음만 장례식 순서지에 남아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집사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오래 기억하며 우리도 피곤한 세상이지만 웃음을 남기며 살도록 힘쓸 것입니다.
웃음을 읽지 않은 홍집사님
우리는 지난 주간 우리 곁에 있던 사랑스러운 집사님을 홀연히 보내야 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집사님을 잘 아는 분이 그렇게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한 구역식구로 지냈던 박금열집사님이 누구보다 슬퍼하셨습니다. 늘 함께 아파하며 사랑을 나누었던 사이라, 장례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박집사님이 유난히 눈물을 많이 흘리셨습니다.
홍집사님은 키가 작았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도 150센티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목소리는 탁한 기가 섞였습니다. 그리고 늘 웃으셨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을 그의 표정에서는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담임목사로 한 번 심방을 하여 대강의 형편은 보았지만 왠일인지 평소처럼 꼬치꼬치 물어보지도 못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사님에게는 장로 동생도 있고 독립기념관 역사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역사학자 동생도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는 혼자 출석하고 있어 적적해 보였지만 1녀 4남 중에서 ‘제일 큰’ 누님이었습니다. 실제로 홍집사님은 남자 동생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위력(!)을 보여준 누님이었음을 동생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따사로운 형제간의 정리를 나누며 살아왔음이 분명했습니다.
뒤늦게 찾은 구원의 길
집사님은 오랫동안 신앙적으로 동생들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런데 명덕 희덕 두 아들이 어릴적부터 삼촌들의 영향으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둘째 아들은 용인에 살면서 지구촌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큰 아들은 요즘 수영로교회를 다닌다고 했습니다. 아이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머니에게 권유했을 것이 틀림없고 동생들도 기도하고 있었으니 집사님도 마침내 신앙생활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그 때가 2,000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직전 1998년, 영주동에서 살다 1992년 구포로 이사 온 후에 남편을 위암으로 잃었습니다. 그러니까 집사님은 남편을 보낸 후 슬픔 속에 마침내 신앙의 길에 접어든 것입니다.
2001년에 세례를 받았고, 2005년에 집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06년 3월 들어서서야 구역예배에 참여하기 시작했다고 제게 이야기 하였더랬습니다. 구역모임에 참여한 일이 신앙역사에 큰 몫을 차지하였던 모양인지, 그 시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후에 집사님은 모든 일에 충직하게 사셨습니다. 교회의 모든 일들에 늘 참석하였습니다. 눈이 아름다웠던 집사님의 눈가는 늘 웃음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은 인생 길
55세에 남편을 병으로 보내고 사는 삶이 쉬울 수만은 없었습니다. 혼자서 가게를 열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을 가진 후에 늘 웃음을 보였지만 속마음은 늘 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일곱 번 도전하여 대학에 들어간 큰 아들이 웬일인지 우울증세를 보이더니 알코홀에 빠져드는 이상증세를 보이기도 하여 아파하였음을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집사님이 병원에서 보낸 시간이 있었다면 아마도 아들에 대한 염려를 가장 많이 하였을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쓰러지는 날도 며칠 전부터 가슴을 아파했고 동네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성심병원으로 갔고 입원하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약 먹고 해결할 것이라고 약방에 들렀다 쓰러졌다고 했습니다. 이미 심근이 경색되기 시작했었지만, 증세를 예사롭게 여긴 것입니다. 물론 그건 지금 나의 아쉬움입니다. 집사님은 그냥 자신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환한 웃음만 장례식 순서지에 남아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집사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래서 오래 기억하며 우리도 피곤한 세상이지만 웃음을 남기며 살도록 힘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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