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의 패배가 차라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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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구 댓글 0건 조회 3,683회 작성일 10-06-19 12:53본문
멋진 축구, 아찔한 축구
월드컵의 계절. 이 계절에 바라보는 축구는 멋있다. 푸른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선수들의 움직임에는 힘이 느껴진다. 긴장으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오밀조밀한 패스를 바라보노라면 재미도 있다. 우리 편이 상대팀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것을 보노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 그게 일본일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축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축구선수들에게 축구 경기는 매번 아찔한 일이다. 아차 하는 순간, 내가 저지른 실수는 골로 연결되고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르는 것을 경험할수록 축구 경기는 엄청난 긴장감을 안겨준다. 선발 출장이 가능할 것인가? 과연 기대하는 대로 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패할 때 돌아올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까? 혹시 어처구니 없는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그라운드에 나서기 전부터 선수들은 심리적인 부담감에 엄청나게 시달려야 할 판이다. 그걸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나이지리아 선수들처럼 경기시작 전에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그 긴장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한국이 그리스를 이기자 엄청난 찬사가 쏟아졌다. 한국축구가 달라졌다고 했다. 패스의 성공률, 선수들이 달린 거리, 달린 속도들을 제시하며 한국 축구가 아시아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평가하며 마냥 즐거워하였다. 확실히 한국축구는 더 이상 ‘뻥’축구가 아니었다. 박지성의 현란한 발재간은 우리 모두를 MVP로 만들어 주었다. 사실 그리스 전의 결과는 우리 모두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일이었다. 2:0의 스코아만 아니라 경기내용이 그랬다. 때문에 모두들 기분 좋아했다. 어쩌면 아르헨티나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성급한 기대들이 만발하였다. ‘강팀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다’는 감독의 말이 축구교과서에 나오는 말처럼 들렸다. 12번째 선수들의 열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하였고, 전국은 온통 다시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아르헨과의 경기에서 형편없이 패하자 차범근 감독의 말대로 ‘그리스전 승리의 주체할 수 없었던 기쁨이 순식간에 분노와 질타’로 바뀌었다. 전국이 다시 끓어오르고 있다. 지고 나면 반드시 원망할 거리를 찾아야 하는 법. 자책골을 내준 박주영과 파울을 두 개나 낸 오범석, 그리고 선수기용과 전술구사에 실패한 허정무 감독에게 비난의 화살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분이 풀릴 판이니 어쩔 수 없다.
지고 이긴 게임
과연 우리는 왜 그렇게 허무하게 아르헨티나에게 대패한 것일까? 가만히 생각하니 질문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축구가 아르헨티나에게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것인가?’ 단연코 아니다. 애당초 그런 실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단 한번의 승리에 마치 천지가 변한 것처럼 우쭐대었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여전히 세계 랭킹 47위에 불과한 팀이다. 실력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13위의 그리스를 이긴 것은 이변에 속하는 일이고 7위의 아르헨티나와 힘든 게임을 한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한다. 아르헨에 2:1로 지고 있다고 공격위주로 나선 것은 무리였다는 평가가 옳은 것 같다.
축구경기는 개인이 하는 경기가 아니다. 때로 개인의 월등한 기량이 팀을 빛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포르투칼의 ‘호날두’, 영국의 축구천재로 불리는 ‘루니’, 독일의 ‘클로제’같은 친구들이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 팀웍이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으면 개별역량이라는 것이 별무소용이다.
나는 아르헨티나 전에서 우리가 4:1로 패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겨지는지 모른다. 만약 1:2로 지고 말았다면 ‘기도 세레머니’로 온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박주영 선수가 자책골의 죄 때문에 영영 축구장을 떠나야 되는 신세가 되고, 염기훈 같은 선수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모두의 잘못이 함께 묻힐 수 있는 4:1 패배가 한국축구를 위해 훨씬 낫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이기고 질 수 있는 게임 때문에 인격을 파탄 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용서와 관용의 폭을 넓혀가는 것, 월드컵의 계절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마18:21-22)
월드컵의 계절. 이 계절에 바라보는 축구는 멋있다. 푸른 그라운드를 누비는 축구선수들의 움직임에는 힘이 느껴진다. 긴장으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오밀조밀한 패스를 바라보노라면 재미도 있다. 우리 편이 상대팀을 통쾌하게 물리치는 것을 보노라면 속이 다 시원하다. 그게 일본일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관중석에서 ‘바라보는’ 축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축구선수들에게 축구 경기는 매번 아찔한 일이다. 아차 하는 순간, 내가 저지른 실수는 골로 연결되고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르는 것을 경험할수록 축구 경기는 엄청난 긴장감을 안겨준다. 선발 출장이 가능할 것인가? 과연 기대하는 대로 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패할 때 돌아올 비난을 어떻게 감당할까? 혹시 어처구니 없는 실수라도 하지 않을까? 그라운드에 나서기 전부터 선수들은 심리적인 부담감에 엄청나게 시달려야 할 판이다. 그걸 어떻게 견디어 낼 수 있을까? 나이지리아 선수들처럼 경기시작 전에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그 긴장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한국이 그리스를 이기자 엄청난 찬사가 쏟아졌다. 한국축구가 달라졌다고 했다. 패스의 성공률, 선수들이 달린 거리, 달린 속도들을 제시하며 한국 축구가 아시아의 한계를 넘어선 것으로 평가하며 마냥 즐거워하였다. 확실히 한국축구는 더 이상 ‘뻥’축구가 아니었다. 박지성의 현란한 발재간은 우리 모두를 MVP로 만들어 주었다. 사실 그리스 전의 결과는 우리 모두의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일이었다. 2:0의 스코아만 아니라 경기내용이 그랬다. 때문에 모두들 기분 좋아했다. 어쩌면 아르헨티나도 이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성급한 기대들이 만발하였다. ‘강팀이 늘 이기는 것은 아니다’는 감독의 말이 축구교과서에 나오는 말처럼 들렸다. 12번째 선수들의 열기는 달아오르기 시작하였고, 전국은 온통 다시 붉은 색으로 물들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아르헨과의 경기에서 형편없이 패하자 차범근 감독의 말대로 ‘그리스전 승리의 주체할 수 없었던 기쁨이 순식간에 분노와 질타’로 바뀌었다. 전국이 다시 끓어오르고 있다. 지고 나면 반드시 원망할 거리를 찾아야 하는 법. 자책골을 내준 박주영과 파울을 두 개나 낸 오범석, 그리고 선수기용과 전술구사에 실패한 허정무 감독에게 비난의 화살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누군가를 희생시켜야 분이 풀릴 판이니 어쩔 수 없다.
지고 이긴 게임
과연 우리는 왜 그렇게 허무하게 아르헨티나에게 대패한 것일까? 가만히 생각하니 질문을 제대로 해야 할 것 같다. ‘한국 축구가 아르헨티나에게 이길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것인가?’ 단연코 아니다. 애당초 그런 실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단 한번의 승리에 마치 천지가 변한 것처럼 우쭐대었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여전히 세계 랭킹 47위에 불과한 팀이다. 실력이 하루아침에 변하는 것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13위의 그리스를 이긴 것은 이변에 속하는 일이고 7위의 아르헨티나와 힘든 게임을 한 것을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 한다. 아르헨에 2:1로 지고 있다고 공격위주로 나선 것은 무리였다는 평가가 옳은 것 같다.
축구경기는 개인이 하는 경기가 아니다. 때로 개인의 월등한 기량이 팀을 빛나게 만들기도 하지만 포르투칼의 ‘호날두’, 영국의 축구천재로 불리는 ‘루니’, 독일의 ‘클로제’같은 친구들이 맥을 추지 못하는 것을 보면 팀웍이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으면 개별역량이라는 것이 별무소용이다.
나는 아르헨티나 전에서 우리가 4:1로 패한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겨지는지 모른다. 만약 1:2로 지고 말았다면 ‘기도 세레머니’로 온 세상의 주목을 받고 있는 박주영 선수가 자책골의 죄 때문에 영영 축구장을 떠나야 되는 신세가 되고, 염기훈 같은 선수도 설 자리를 찾지 못할 수도 있다. 모두의 잘못이 함께 묻힐 수 있는 4:1 패배가 한국축구를 위해 훨씬 낫다는 이야기이다. 누구나 이기고 질 수 있는 게임 때문에 인격을 파탄 내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용서와 관용의 폭을 넓혀가는 것, 월드컵의 계절에 우리가 유의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찌니라.” (마18: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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