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칠한 목사, 꿈을 남기고 떠나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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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구 댓글 0건 조회 3,501회 작성일 10-09-04 07:34본문
세상이 기억하는 목사님
그가 가셨다. 그 많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의 삶을 접었다. 얼마만인가. 목사의 죽음을 교계신문이 아닌 일반신문이 1면기사로 보도한 것을 본 기억이 퍽이나 오래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의 죽음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주눅이 들었는데 그래도 세상이 옥목사님의 죽음을 기억해 주니 다행이다.
기독교회는 영웅이 자라지 않는다. 교회는 로마교회처럼 교황이니 추기경이니 하는 자리가 없고, 불교처럼 종정(宗正)이니 하는 공적인 ‘영구적인 최고의 사람’을 만들지도 않는다. 총회장, 노회장 하는 것은 그냥 일년직으로 지나가는 자리일 뿐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가 대표를 맡아 수행할 뿐이다. 공적으로 교회로부터 인정받는 그런 ‘위대한 인물’은 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은근히 기독교인들도 다른 종교처럼 그런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교회를 부패케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음을 잘 알기 때문에 결코 그런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한상동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부산의 거리를 자동차로 메워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한목사님의 생애를 사람들은 귀하게 본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이 떠났을 때도 사회적으로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북한에서 내려와 영락교회라는 굴지의 교회를 세웠고 육영과 복지사업에 헌신하였을 뿐 아니라, 사역을 마친 다음에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조그만 집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는 수도자적 모습을 보여준 목사님에 대한 존경이 서울 길거리에 흘러내렸다.
옥한흠 목사님은 한경직, 한상동 목사님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목회자였다. 그는 남다른 역사적 정황속에 있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변두리에 살거나 격변의 세월을 거스르며 사신것도 아니었다. 그는 서울의 부촌이라는 불리는 서초동에 교회를 세웠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가진 사람들과 평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귀국해서는 개발이 한창인 서울 한복판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일군, 소위 ‘성공한 목회자’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라면 그가 특별히 추앙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어쩌면 기독교 부르주아(bourgeois)로 불리며 지탄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의 떠난 소식은 모든 교회와 지도자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도 관심을 모으고 있고, 듣는 사람마다 애석해 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이자 이론가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로 명성을 높혔다. 65세에 조기 은퇴하면서 ‘7천명의 청년들이 있는 교회를 나이든 목사가 맡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댔다. 교회의 성격에 맞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남들이 인정하는 자신의 탁월성을 역사에 묻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그의 위대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일치와 갱신, 섬김이 극대화되는 교회의 변화와 성도들의 제자화를 갈구하였고, 그를 위해 몸을 던졌다.
교회의 변화를 갈구한 목사님
그는 1996년 장로교 합동측 목사들을 중심으로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교갱협)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마침 같은 해 2월, 복음병원의 부조리를 보며 나와 몇몇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변화하는 교회와 세상에서 고신의 정신을 이어가기 원하는 목회자협의회’(고목협)와 만나면서 우리는 함께 장로교의 변혁을 꿈꾸었다. 그런데 그 꿈이 폭발적으로 자라 1998년에는 15개 교단의 젊은 사고를 가진 목회자들로 구성된 교회개혁을 소망하는 기구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조직하게 되었다. 옥한흠 목사님이 자연스럽게 그 조직의 중심이 되었고, 사랑의 교회는 한 해에 오천만원씩 재정지원을 하였다. 보수적인 한기총과 진보적인 NCC(한기협)로 나누어진 한국교회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위하여 수많은 열린마당을 통한 대화를 추구하였고, 24개 교단 대표들로 ‘교단장협의회’를 구성하는 데 산파역할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교회 개혁가’로 불리고 있다. 지난 12년간 그와 함께 한국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애를 쓴 세월이 내게 남아있어 나는 너무 행복하다. 우리의 꿈이 아직은 결실을 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한국교회에 역동적인 변화의 물꼬를 트리라 확신한다. 자신과 목회자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까칠했던 옥목사님은 가셨으나 그와 우리의 꿈은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 가정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그가 가셨다. 그 많은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세상의 삶을 접었다. 얼마만인가. 목사의 죽음을 교계신문이 아닌 일반신문이 1면기사로 보도한 것을 본 기억이 퍽이나 오래 되었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의 죽음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킬 때마다 우리는 주눅이 들었는데 그래도 세상이 옥목사님의 죽음을 기억해 주니 다행이다.
기독교회는 영웅이 자라지 않는다. 교회는 로마교회처럼 교황이니 추기경이니 하는 자리가 없고, 불교처럼 종정(宗正)이니 하는 공적인 ‘영구적인 최고의 사람’을 만들지도 않는다. 총회장, 노회장 하는 것은 그냥 일년직으로 지나가는 자리일 뿐이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가 대표를 맡아 수행할 뿐이다. 공적으로 교회로부터 인정받는 그런 ‘위대한 인물’은 날 수 있는 여지가 없다. 은근히 기독교인들도 다른 종교처럼 그런 사람이 있기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교회를 부패케 만든 중요한 요인이었고, 그래서 역사적으로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났음을 잘 알기 때문에 결코 그런 사람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산에서 한상동 목사님이 돌아가셨을 때, 부산의 거리를 자동차로 메워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목숨을 걸었던 한목사님의 생애를 사람들은 귀하게 본 것이다. 한경직 목사님이 떠났을 때도 사회적으로 굉장한 반향을 일으켰다. 북한에서 내려와 영락교회라는 굴지의 교회를 세웠고 육영과 복지사업에 헌신하였을 뿐 아니라, 사역을 마친 다음에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조그만 집에서 남은 세월을 보내는 수도자적 모습을 보여준 목사님에 대한 존경이 서울 길거리에 흘러내렸다.
옥한흠 목사님은 한경직, 한상동 목사님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목회자였다. 그는 남다른 역사적 정황속에 있지 않았다. 그는 사회적 변두리에 살거나 격변의 세월을 거스르며 사신것도 아니었다. 그는 서울의 부촌이라는 불리는 서초동에 교회를 세웠다. 잘난 사람, 똑똑한 사람, 가진 사람들과 평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대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공부하였고, 귀국해서는 개발이 한창인 서울 한복판에서 교회를 개척하여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일군, 소위 ‘성공한 목회자’이다. 그것이 이야기의 끝이라면 그가 특별히 추앙을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어쩌면 기독교 부르주아(bourgeois)로 불리며 지탄을 받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 그의 떠난 소식은 모든 교회와 지도자들, 심지어 세상으로부터도 관심을 모으고 있고, 듣는 사람마다 애석해 하게 만들고 있다. 그는 탁월한 설교가이자 이론가로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로 명성을 높혔다. 65세에 조기 은퇴하면서 ‘7천명의 청년들이 있는 교회를 나이든 목사가 맡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댔다. 교회의 성격에 맞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며 남들이 인정하는 자신의 탁월성을 역사에 묻어버렸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그의 위대성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는 일치와 갱신, 섬김이 극대화되는 교회의 변화와 성도들의 제자화를 갈구하였고, 그를 위해 몸을 던졌다.
교회의 변화를 갈구한 목사님
그는 1996년 장로교 합동측 목사들을 중심으로 ‘교회갱신을 위한 목회자 협의회’(교갱협)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마침 같은 해 2월, 복음병원의 부조리를 보며 나와 몇몇 목사가 중심이 되어 만든, ‘변화하는 교회와 세상에서 고신의 정신을 이어가기 원하는 목회자협의회’(고목협)와 만나면서 우리는 함께 장로교의 변혁을 꿈꾸었다. 그런데 그 꿈이 폭발적으로 자라 1998년에는 15개 교단의 젊은 사고를 가진 목회자들로 구성된 교회개혁을 소망하는 기구인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를 조직하게 되었다. 옥한흠 목사님이 자연스럽게 그 조직의 중심이 되었고, 사랑의 교회는 한 해에 오천만원씩 재정지원을 하였다. 보수적인 한기총과 진보적인 NCC(한기협)로 나누어진 한국교회를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위하여 수많은 열린마당을 통한 대화를 추구하였고, 24개 교단 대표들로 ‘교단장협의회’를 구성하는 데 산파역할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지금 ‘교회 개혁가’로 불리고 있다. 지난 12년간 그와 함께 한국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고 애를 쓴 세월이 내게 남아있어 나는 너무 행복하다. 우리의 꿈이 아직은 결실을 보지 못하지만 언젠가는 한국교회에 역동적인 변화의 물꼬를 트리라 확신한다. 자신과 목회자들에게 쓴소리를 아끼지 않고 까칠했던 옥목사님은 가셨으나 그와 우리의 꿈은 영원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가 그 가정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충만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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