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버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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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구 댓글 0건 조회 3,321회 작성일 10-09-14 18:09본문
<딸은 잠시 즐거웠으나 세상이 지탄(指彈)한 아버지>
토요일 아침 신문은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를 머릿글로 크게 다루고 있었다. 고위 공직자 인사검증 공포증이 심해져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라는 총리직을 마다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상당히 여러사람에게 검증서를 보내보라고 요구했지만 대답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청문회를 통과할 자신이 없어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병역에 걸리거나 세금 포탈, 자동차 사고, 위장전입이나 재산 형성과정 등에서 대답을 잘 할 자신이 없어 꿈에도 소원일 수 있는 총리의 자리를 마다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명망이 높고, 그동안 각종 중요한 자리에서 기세를 높이던 사람들이 막상 최고의 자리를 주려고 하니 자신이 없어 하는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반면, 다른 신문은 지난 9월 6일에 장례식을 치른 옥한흠 목사와 유명환 외교부장관을 비교분석하는 글을 실었다. ‘억제력’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유장관은 딸을 5급 공무원으로 특채한 사실이 드러나 장관직을 내 놓는 비극을 연출하였다. 자신 뿐 아니라 제1차관이 인사권을 잃어버렸고, 인사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위세등등한 고위관료가 졸지에 그 보직에서 밀려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관리 중에서는 장관외에는 최고위직인 차관과 악수를 마다한 사건까지 생겨났다하여 지금 외교통상부는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외교관들이 특권층이 되어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특권을 누리게 만들려 하다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절제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너무 잘 보여주었다.
<아들은 지탄하고, 세상은 부러워한 아버지>
이런 외교부 장관과는 달리 육신의 삶을 마감한 옥한흠 목사는 장례식장에서까지 한 아들에게서 섭섭하다는 소리를 듣는 얄궂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초동 사랑의 교회당에서 발인예배를 마친 옥목사님의 시신은 안성 사랑의 교회 수양관으로 옮겨져 하관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묻히는 절차를 밟았다. 기왕에 힘들게 서울까지 올라간 길이라 교회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안성까지 내려갔었다. 하관예배에도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함께 하였다. 오후 3시에 드리도록 계획된 시간에 거의 맞춰 장례행렬이 도착하였다. 3시 10분전쯤에는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 순간 유족석에 앉았던 사모님과 세 아들이 앞에 놓인 시신 앞에 영정사진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서 사진 촬영을 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하관예배를 드리기 전에 관앞에서 영정사진과 함께 사진을 찍는 유족을 본 적이 없다.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시작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예배를 마치고 축도를 하도록 인도자가 어느 목사님을 소개하는 순간, 옥목사님의 후계자 오정현 목사가 나와 유족 중 둘째 아들이 인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니 시간을 주겠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 옥성원씨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대뜸 “우리 가족이 앞서 관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진을 찍은 것은....” 하면서 눈물을 훔치기 시작한다.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제자훈련에는 능하셨으나 가족을 돌아보는 데는 무지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어떻게 돌아보는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몰랐었기 때문에 용서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삶을 바친 아버지였기에 자신들을 돌보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말을 그 주검 앞에서 털어놓고 있었다. “여기계시는 목사님들, 신학책 10권 읽으시면 한권은 가정에 관한 책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주검을 빌려 거기에 참여한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에게 뼈아픈 충고를 하고 있었다. 옥목사님은 아버지로서 변변한 가족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교회를 위하여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죽여가신 것이었다. 얼마든지 남 못지 않는 생활을 누리고 자녀들에게 누리게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명환 장관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인간의 억제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절제의 열매를 맺고 사신 분이셨던 것이다. 절제력을 잃어 총리할 사람이 없는 세상, 장관직을 잃는 사람들 틈에 한없는 절제력을 보인 옥목사님이 너무나 돋보이는 주간이었다. 옥목사님을 가까이 할 수 있었음이 새삼 감사로 다가온다.
토요일 아침 신문은 재미있는 기사를 하나를 머릿글로 크게 다루고 있었다. 고위 공직자 인사검증 공포증이 심해져서 ‘일인지하(一人之下) 만인지상(萬人之上)’의 자리라는 총리직을 마다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상당히 여러사람에게 검증서를 보내보라고 요구했지만 대답한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청문회를 통과할 자신이 없어 스스로 포기해 버린다는 것이다. 병역에 걸리거나 세금 포탈, 자동차 사고, 위장전입이나 재산 형성과정 등에서 대답을 잘 할 자신이 없어 꿈에도 소원일 수 있는 총리의 자리를 마다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 명망이 높고, 그동안 각종 중요한 자리에서 기세를 높이던 사람들이 막상 최고의 자리를 주려고 하니 자신이 없어 하는 이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을까?
반면, 다른 신문은 지난 9월 6일에 장례식을 치른 옥한흠 목사와 유명환 외교부장관을 비교분석하는 글을 실었다. ‘억제력’에 차이가 있음을 지적해 주었다. 유장관은 딸을 5급 공무원으로 특채한 사실이 드러나 장관직을 내 놓는 비극을 연출하였다. 자신 뿐 아니라 제1차관이 인사권을 잃어버렸고, 인사관리를 책임지고 있던 위세등등한 고위관료가 졸지에 그 보직에서 밀려나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관리 중에서는 장관외에는 최고위직인 차관과 악수를 마다한 사건까지 생겨났다하여 지금 외교통상부는 초상집 분위기가 되어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외교관들이 특권층이 되어 자신 뿐 아니라 자녀들까지 특권을 누리게 만들려 하다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절제하지 못한 사람들의 말로가 어떠한가를 너무 잘 보여주었다.
<아들은 지탄하고, 세상은 부러워한 아버지>
이런 외교부 장관과는 달리 육신의 삶을 마감한 옥한흠 목사는 장례식장에서까지 한 아들에게서 섭섭하다는 소리를 듣는 얄궂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서초동 사랑의 교회당에서 발인예배를 마친 옥목사님의 시신은 안성 사랑의 교회 수양관으로 옮겨져 하관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묻히는 절차를 밟았다. 기왕에 힘들게 서울까지 올라간 길이라 교회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안성까지 내려갔었다. 하관예배에도 많은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함께 하였다. 오후 3시에 드리도록 계획된 시간에 거의 맞춰 장례행렬이 도착하였다. 3시 10분전쯤에는 준비가 완료되었다.
그 순간 유족석에 앉았던 사모님과 세 아들이 앞에 놓인 시신 앞에 영정사진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서서 사진 촬영을 하는 것 아닌가. 지금까지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하관예배를 드리기 전에 관앞에서 영정사진과 함께 사진을 찍는 유족을 본 적이 없다.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시작된 예배를 드리면서 그 사실을 잊어버렸다. 예배를 마치고 축도를 하도록 인도자가 어느 목사님을 소개하는 순간, 옥목사님의 후계자 오정현 목사가 나와 유족 중 둘째 아들이 인사를 하겠다는 의사를 밝히니 시간을 주겠다고 하였다.
둘째 아들 옥성원씨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대뜸 “우리 가족이 앞서 관 앞에서 사진을 찍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진을 찍은 것은....” 하면서 눈물을 훔치기 시작한다. 금방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제자훈련에는 능하셨으나 가족을 돌아보는 데는 무지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가족을 어떻게 돌아보는지 몰랐던 것 같습니다. 몰랐었기 때문에 용서하려고 합니다.” 교회에 삶을 바친 아버지였기에 자신들을 돌보는 일에 실패하였다는 말을 그 주검 앞에서 털어놓고 있었다. “여기계시는 목사님들, 신학책 10권 읽으시면 한권은 가정에 관한 책을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아버지의 주검을 빌려 거기에 참여한 기라성 같은(!) 목사님들에게 뼈아픈 충고를 하고 있었다. 옥목사님은 아버지로서 변변한 가족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교회를 위하여 그는 철저하게 자신을 죽여가신 것이었다. 얼마든지 남 못지 않는 생활을 누리고 자녀들에게 누리게 할 수 있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유명환 장관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인간의 억제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절제의 열매를 맺고 사신 분이셨던 것이다. 절제력을 잃어 총리할 사람이 없는 세상, 장관직을 잃는 사람들 틈에 한없는 절제력을 보인 옥목사님이 너무나 돋보이는 주간이었다. 옥목사님을 가까이 할 수 있었음이 새삼 감사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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