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생감>의 드라마를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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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성구 댓글 0건 조회 3,553회 작성일 09-10-28 07:43본문
<우생감>의 드라마를 쓸 수 있습니다
지난 한 주간 나는 1981년 2월, 함께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부부들과 더불어 베트남, 캄보디아를 다녀왔습니다. 졸업한지 28년만에 동기회 회장이 된 목사님 교회의 평신도 사역자들이 후원금을 만들어, 형편이 여의치 않은 목사님들 몫 경비까지 부담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두 말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졸업 후에 언제 한 번 보았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경북 시골 교회를 27년간 목회하고 있던 목사님까지 동행하게 되어 오랜만에 그 옛날 학생시절 기분으로 여행길에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먼저 베트남 하노이를 찾았습니다. 하노이는 소위 북베트남인 ‘월맹’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1960년대 발발한 전쟁으로 베트남은 처절한 민족상잔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노이라는 도시 이름을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노이는 ‘자유대한’이 바라볼 때 철저하게 공산주의를 숭상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 하노이를 남베트남 ‘월남’의 수도 사이공보다 먼저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하노이가 있는 북쪽 베트남은 하롱베이라는, 3,300개의 섬들이 장관을 이루는 해안을 보려고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은 정말 아름다웠고 하롱베이의 섬들은 탄성을 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자연 보고(寶庫)를 갖고 있어도 베트남은 여전히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김일성과 아주 가깝게 지내기도 한 호치민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주민들은 거짓된 평등의 구호 속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월남을 지원한 미국과의 그 치열한 싸움에서 결코 지지 않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이 그들을 배부르게 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남쪽 베트남 지역을 가보지 못하였고 하루 이틀의 여행으로 베트남 전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의 힘으로 낙원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호치민을 그렇게 숭상하여 굉장한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그가 살던 곳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낙원의 꿈은 요원하였습니다.
캄보디아는 더욱 캄캄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 선교사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아시아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로서 10여년 세월을 보내기도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한마디로 캄보디아 성인들에게서는 소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아예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나섰습니다. 미래를 보고 사역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래도 행복지수는 높아 세계 5위라고 했지만, 그들은 너무 돈이 없었습니다. 길거리의 아이들은 그저 ‘one dallar\"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줄 알았고 그들은 돈이 없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하는 날이라 군인들이 방문장소 인근을 경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영어를 꽤 잘하는 친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혼자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서른아홉 살인데 벌써 군에 입대한지 21년이 되었으니 그저 군대밖에 모르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가슴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졌고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전혀 소망을 이룰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돈이 없다고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얼마라도 돈을 좀 줄 수 없겠느냐는 눈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함에 절어 있었습니다. 너서살 먹는 아이들도 무슨 물건이든지 하나씩 들고 관광객의 뒤를 따라다니며 ’원달러‘를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자원이 많은 나라들이고 잘살았던 나라들이지만 그들은 지금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을 찾을 때마다 그들을 도울 준비와 각오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감사’의 계절을 보내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우리 생애 최고의 감사’를 금년에 드려보았으면 합니다. 교회적으로 심히 어려운 순간을 보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셨고,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위로하며 살게 하시며, 경제적 위기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생감>, 저와 여러분이 쓰는 아름다운 드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나는 1981년 2월, 함께 고려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목사부부들과 더불어 베트남, 캄보디아를 다녀왔습니다. 졸업한지 28년만에 동기회 회장이 된 목사님 교회의 평신도 사역자들이 후원금을 만들어, 형편이 여의치 않은 목사님들 몫 경비까지 부담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두 말 없이 따라 나섰습니다. 졸업 후에 언제 한 번 보았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 경북 시골 교회를 27년간 목회하고 있던 목사님까지 동행하게 되어 오랜만에 그 옛날 학생시절 기분으로 여행길에 나설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먼저 베트남 하노이를 찾았습니다. 하노이는 소위 북베트남인 ‘월맹’의 수도였던 곳입니다. 1960년대 발발한 전쟁으로 베트남은 처절한 민족상잔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 때 나는 하노이라는 도시 이름을 들었습니다. 오랫동안 하노이는 ‘자유대한’이 바라볼 때 철저하게 공산주의를 숭상하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그 하노이를 남베트남 ‘월남’의 수도 사이공보다 먼저 방문하게 된 것입니다. 하노이가 있는 북쪽 베트남은 하롱베이라는, 3,300개의 섬들이 장관을 이루는 해안을 보려고 많은 관광객이 몰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은 정말 아름다웠고 하롱베이의 섬들은 탄성을 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자연 보고(寶庫)를 갖고 있어도 베트남은 여전히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김일성과 아주 가깝게 지내기도 한 호치민은 공산주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주민들은 거짓된 평등의 구호 속에 가난을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월남을 지원한 미국과의 그 치열한 싸움에서 결코 지지 않는 놀라운 모습을 보였지만 그것이 그들을 배부르게 하지는 못한 것입니다. 남쪽 베트남 지역을 가보지 못하였고 하루 이틀의 여행으로 베트남 전체를 아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인간의 힘으로 낙원을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호치민을 그렇게 숭상하여 굉장한 기념관을 만들어 놓고 그가 살던 곳을 보호하고 있었지만 낙원의 꿈은 요원하였습니다.
캄보디아는 더욱 캄캄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는 한 선교사님이 들려준 이야기는 우리의 생각을 새롭게 만들었습니다. 그 선교사님은 아시아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교수로서 10여년 세월을 보내기도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한마디로 캄보디아 성인들에게서는 소망을 발견할 수 없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어쩔 수 없어 신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들을 통하여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아예 유치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나섰습니다. 미래를 보고 사역을 하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캄보디아는 너무 가난했습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입니다. 그래도 행복지수는 높아 세계 5위라고 했지만, 그들은 너무 돈이 없었습니다. 길거리의 아이들은 그저 ‘one dallar\"를 입에 달고 살았습니다. 돈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줄 알았고 그들은 돈이 없어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이 방문하는 날이라 군인들이 방문장소 인근을 경비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영어를 꽤 잘하는 친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혼자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했습니다. 서른아홉 살인데 벌써 군에 입대한지 21년이 되었으니 그저 군대밖에 모르는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가슴에는 배움에 대한 열망을 가졌고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전혀 소망을 이룰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돈이 없다고 내게 간절한 눈빛을 보냈습니다. 얼마라도 돈을 좀 줄 수 없겠느냐는 눈치였습니다. 그들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부족함에 절어 있었습니다. 너서살 먹는 아이들도 무슨 물건이든지 하나씩 들고 관광객의 뒤를 따라다니며 ’원달러‘를 입에 달고 있었습니다. 우리보다 자원이 많은 나라들이고 잘살았던 나라들이지만 그들은 지금도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을 찾을 때마다 그들을 도울 준비와 각오가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지금 제대로 ‘감사’의 계절을 보내도록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가 뭐라고 하던 ‘우리 생애 최고의 감사’를 금년에 드려보았으면 합니다. 교회적으로 심히 어려운 순간을 보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은혜를 주셨고, 서로 사랑하며 아끼며 위로하며 살게 하시며, 경제적 위기에서도 우리를 지켜주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생감>, 저와 여러분이 쓰는 아름다운 드라마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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