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569회 작성일 17-07-06 10:10본문
7/2
역사는 반드시 기억되어야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고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을 하면서 6.25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벌어진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가 새삼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오후 4시께 미 버지니아주 콴티코 국립 해병대 박물관에 건립된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찾았습니다. 이 기념비는 지난 2015년 7월 착공돼 지난 5월 준공됐습니다. 총사업비는 60만 달러(약 7억 원)가량이 들어갔으며 우리 정부는 절반이 안 되는 3억 원 가량만을 지원했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장진호 전투 기념비가 박근혜 정부 인사인 박승춘 전 국가보훈처장이 현재의 집권여당인 더불어 민주당이 반대하는 가운데 끝내 설립을 추진하여 이룬 사업이라는 것입니다. 건립을 반대한 민주당 대표였던 사람이 대통령이 되어, 한미관계를 의심하는 국민들이 많은 때에, 그 기념비를 찾아 미국과 한국이 혈맹관계라는 사실을 천하에 선포한 것은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에는 여야가 있을 수 없음을 잘 보여줍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군 전쟁사에서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돼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치열한 전투를 통해 중공군의 남하를 막아내며 북한 주민들이 남한으로 피란한 '흥남철수 작전'이 가능했다는 것입니다. 장진호 전투와 흥남 철수 작전으로 문 대통령을 비롯해 조셉 던포드 미 합참의장, 제임스 매티스 미 국방장관 등 현재 한미 양국의 고위급 인사가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흥남 출신인 문 대통령 부모도 이때 흥남부두에서 7600톤급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타고 탈출했습니다. 그렇게 피란한 지 3년 뒤인 1953년 1월, 거제에서 문 대통령이 태어난 것입니다. 장진호 전투를 거쳐 흥남철수가 가능해졌고 그에 따라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태어나는 일련의 사건이 벌어진 셈입니다. 놀라운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한국 전쟁 중인 1950년 겨울 미국 1 해병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 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 속 곳곳에 숨어있는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 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었다가, 가까스로 후퇴에 성공한 전투라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성공한 후퇴작전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지만 이 전투는 실제로 중공군의 침입을 적은 군사력으로 막아섰던 전투였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1950년 11월 26일부터 12월 13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 (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미군의 전사(戰史)에 "역사상 가장 고전했던 전투"로 기록되어 있으며, 생존자가 몇 안 된다 하여 영어로 그들을 가리켜 "The Chosin Few"라 하였는데 그 말은 "The Chosen Few" (선택 받은 소수)를 의미하는 일종의 언어유희, 동음이의(同音異意)적 익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해병사단장 올리버 장군은 이 작전을 “후퇴가 아닌 새로운 방향으로의 공격”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 후퇴작전을 통해서, 미 해병1사단은 자신의 10배에 달하는 12만의 중공군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12만 명의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만약 한국전 참전 美해병대가 무너졌다면 UN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했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뀌었을 것이라는 것이 군사평론가들의 평가는 우리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듭니다. 후퇴작전이 새로운 공격이 되고 그게 한나라의 역사를 바꾸는 이 오묘한 역사의 흐름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우리의 감사는 누구에게로 향해야 하는 걸까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