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평화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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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2,649회 작성일 17-05-23 11:46본문
독일 통일의 불씨, 라이프찌히 니콜라이 교회의 월요 평화기도회
김영윤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라이프치히와 니콜라이교회
독일 중동부 상업도시, 라이프치히. 여느 동독의 다른 도시들과는 다른 위상과 역사를 지니고 있다. 교통의 요지다. 그래서 수난도 많이 겪었다. 30년 전쟁과 나폴레옹의 침입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인 1945년 8월에는 연합군의 집중포화를 맞아 도시의 4분의 1이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라이프치히의 도시민들은 유난히 강한 자긍심을 가졌다. 오랜 상업 전통으로 확립한 국제성과 수준 높은 문화의식도 갖추고 있다. 이미 중세 때부터 상품 박람회의 지위를 굳건히 지켜왔으며, 1985년부터는 세계 최초 표준박람회(Mustermesse)를 개최하는 전통을 쌓아왔다. 동서교역의 중심지로 많은 세계의 사람들의 방문이 이루어졌으니 라이프치히 사람들은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세계로 닿아 있는 셈이었다.
그 도시의 한 복판에 니콜라이 교회가 있다. 1165년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진 교회지만 16세기 초에 고딕양식으로 완성되었다. 니콜라이 교회는 마틴 루터, 음악의 아버지 바흐, 슈바이처 박사와도 인연이 깊다. 그런데 우리의 관심은 이 교회가 독일 통일의 불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평화 혁명이 이곳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교회는 1982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후 5시마다 ‘평화의 기도회’를 열었다. 서구의 군비증강에 항의하기 위해, 세계의 가난과 질병, 파괴되는 환경, 그리고 전쟁과 핵무기로부터 인류를 구해내기 위해 간절한 기도를 그 곳에서 했다. 교회를 찾아오는 방문객들은 교회의 입구에 기도제목을 적어 놓은 노란색 종이와 촛불을 놓았다. 이 ‘평화의 기도’에서는 공정하지 않은 권력자들의 이름이 언급된다. 그들의 운명을 바꿔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
평화의 기도회와 월요데모
동독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그와 같은 주제의 기도회가 가능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동독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가 아니었다. 교회는 항상 슈타지(Stasi)라는 비밀경찰의 엄격한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라는 장소가 비교적 정권의 통제를 덜 받던 곳이었다. 또한 동독 교회를 지켜내려는 서독 교회의 지원, 유럽 사회의 평화를 위해 기도회를 연다는 명분, 동독 내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보장되어 있다는 동독 정권의 대외 선전 목적 때문에 그런 활동이 가능했었다. 그래서 통일 전 동독 내 교회는 정치적으로 탄압받던 재야인사들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했다.
그런데 1989년 9월 4일 ‘평화기도회’는 양상이 달랐다. 구소련으로부터 시작된 동유럽의 변혁이 거세게 몰아치던 것과 때를 같이하여 새로운 정치운동의 시발점이 된 날이었다. 9월 4일 평화기도회가 끝났어도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오히려 교회 앞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시민들도 이에 합세하기 시작했다. 슈타지의 강력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거리로 행진을 하기 시작했다.
약 1천 명의 시민들이 “슈타지는 물러가라(Stasi raus)!” “여행의 자유를 달라 (Reisesfeiheit)”라는 구호를 외쳤다. 슈타지의 무력진압이 시작됐고 70명의 재야인사들이 체포되었다. 하지만 시위는 그치지 않았다. 그 후 2개월은 동독의 운명을 결정하는 결정적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 다음 월요일 9월 11일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동독을 새로운 사회로 변화시키는 ‘월요데모(Montagsdemonstration)’가 된 것이다. 슈타지는 체포와 강제진압으로 9월 11일과 18일자 월요데모에 대응, 더 이상 운동이 지속되지 못하도록 했다. 하지만 9월 25일 평화기도회가 끝난 월요데모에는 무려 8천명이 합류하는 기록을 세웠다. 저항운동은 더 거세져 갔다.
10월 2일자 월요데모에는 2만 명이라는 숫자가 참가, 슈타지와 시위대 사이에 유혈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장벽 붕괴 한 달 전 1989년 10월 9일. 촛불 기도회 후 월요데모에는 무려 7만 명이 가담했다. 그들은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와 손에 손을 잡고 거대한 원을 그렸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비폭력(keine Gewalt)’을 외쳤다. 자발적으로 폭력자제를 요구하면서 ‘자유’와 ‘자유선거’, ‘정치범 석방’을 외쳤다. 이 같은 시위는 동독 전체에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무력으로 시위를 중단시키려 했던 공안당국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동독 정부도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 이는 민주주의 운동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라이프치히 중심부에서 행해진 이 시위는 당시 교파를 초월한 종교인사, 재야인사 그리고 저항하는 국민들이 함께 한 민주주의 운동의 상징이었다.
10월 16일 월요데모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12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시위에 참가했다. 참으로 놀라왔던 것은 경찰이나 군인들도 이와 같은 평화시위를 위한 대화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당시를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함께한 승자도 패자도 없는 놀랍도록 평화로운 분위기’였다고 전하고 있다. 실제 시위에 참여했던 그 많은 사람 중 단 한 명도 돌을 들지 않았으며, 경찰도 단 한 발의 총도 쏘지 않았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들은 오직 ‘더 이상 거짓으로 살지 않기 위해’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틀 후 동독 사회주의 권력의 정점에 섰던 호네커(Erich Honecker)는 권좌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재임기간 중 그토록 탄압했던 교회에 도움을 받아 동베를린 소재 소련 야전병원으로 도피한 후 구소련 망명길에 올랐다. 그로부터 3주가 지난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기도해야 한다
독일이 통일된 지 벌써 만 20년이 넘었다. 통일의 불씨로 평화와 정의를 상징하는 니콜라이교회에서는 지금도 평화의 기도회가 열린다. 미국의 이라크 전쟁(2003년)과 독일 정부의 복지예산 삭감에 항의(2006년)해 월요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그들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방법으로 통일의 문을 열었다. 20년 전 평화의 기도회를 보며 분단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기도는 성경구절의 해석이다. 그러나 평화의 기도에서는 성경구절의 해석 대신, 행동이 중심에 있었다.
10월 9일 월요데모에 나서면서 그들은 “저희는 오늘 출동명령을 거부하여 체포된 기동경찰대와 오늘 출동해야 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가 사람들과 사람들의 어려움을 위해 항상 열려있기를 기도합니다. 진실이 통할 수 있게 도와주도록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교만함을 거두어 주시고, 당신의 사랑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 속에서 살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분단의 땅 한국에서도 기도해야 한다. 북한 동포의 삶을 위해, 그들을 보듬고 협력할 수 있는 기도를 해야 한다. 하나님의 한반도에 대한 의지가 북녘에도 전해지고 실천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필자소개: 독일 브레멘 대학 경제학 박사, 현재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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